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외교 (문단 편집) === 서유럽 === [[서유럽]]과의 관계는 복잡미묘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당연히 자신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상 기존의 제국을 멸시했기 때문에, '원조 로마'인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해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수많은 흠집이 가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린 800년 이후 점차 심해졌고, '로마 제국의 정통'을 표방하던 동로마인들로서는 카롤루스 대제 및 그 계승자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동로마와 서유럽은 동로마의 존속 기간 내내 이슬람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있었고, 때문에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무릅쓰고 서로간 협력을 하기도 했으며, 좀 후세의 동로마 황제들은 신성 로마 황제들을 '황제'로 인정하고 혼인 동맹을 시도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는 또 다른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9세기 초 프랑크의 역사가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는 저서 '카를 대제전(Vita Karoli Magni)'은 서유럽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19장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를 '그리스인들의 황제(Grecorum imperatore)'라고 일컬었으나, 반대로 뒤의 제28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로마 황제(Romanis imperatoribus)'라고 일컫는 등 그 호칭 표기와 관련하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로마에 대한 서방인들의 폄하 어린 시선은 노골적으로 변해 갔으며, 아예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 황제라고 격하시켰다. 871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가 당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자신의 로마 황제 즉위에 이의를 제기한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한 답장으로[* 바실리우스 1세의 편지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 '당신네 그리스인들은 로마 시(市), 로마인, 로마의 언어도 몽땅 버리고 다른 도시, 제위, 민족과 언어로 옮겨가지 않았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것만 봐도 알수 있다.[*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337][* 물론 외교 문서이니만큼 '영혼의 형제'니 뭐니 띄워줬지만, 어딜 봐도 동로마인들의 자격지심을 콕콕 자극하는 내용이다. 이미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가 정치/경제적으로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도시는 그 국가가 기원한 일종의 성지였을 테고, 자기들이 원해서 그런 건 아니라지만 기껏 수복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에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s-6|통치 개판으로 하다가 민심 잃고]] 쫓겨나서 프랑크인들이 대신 로마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동로마인들에게 유쾌하게 느껴졌을 리가 없다. 답장의 번역자 찰스 웨스트에 따르면, 애초에 이 답장의 실제 저자 자체가 로마 출신이자 동로마통이기도 했던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이니, 애초에 철저하게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황제|(신성) 로마 황제]]에 등극([[962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968년]] 오토 1세의 아들(후의 [[오토 2세]])과 전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와의 혼담을 논의하기 위해 서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는데, 그때 겸사겸사 전해준 [[교황]] [[요한 13세]]의 편지에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들의 황제(Emperor of the Greeks)'가 언급된 것을 보고 뚜껑 열린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를 수장으로 하는 사신들을 모조리 감방으로 보내버린 뒤 추방시킨 일도 있었다.[*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는 젊은 시절에는 자비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학하기도 하는 등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서방의 대표적인 동로마통 인물로 활약하였다. 968년 이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사절 업무를 수행하는 등 대(對) 동로마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전까지는 딱히 동로마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968년 감금당한 이후로는 단단히 앙심을 품고 동로마 궁정을 욕하는 온갖 악담과 사실 왜곡을 늘어놓는 기록을 남겼다. 문제는 이후 그와 같은 동로마통 인물이 서방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평도 있을 정도로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리우트프란드였기에, 동로마와 관련하여 남긴 여러 악평들이 후세에까지 제법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또한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을 내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니키포로스 2세는 교황의 편지를 읽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리우트프란드 사절단을 푸대접했고, 당연히 니키포로스 2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었던 리우트프란드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모를 극단적으로 비하하는 [[인신공격]]성 기록을 남겼다. 작은 키, 큰 머리, 두더지같이 작은 눈, 혐오스런 턱수염, 체구에 비해 긴 엉덩이, 낡고 악취 나는 옷차림 등... 그리고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에 대해 태클을 거는 니키포로스 2세에게 "우리 [[오토 1세]] 님이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정작 이 세상의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거들먹거리는 너님은 뭐했나요?"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니키포로스 2세 역시 지지 않고 "네놈들은 로마인이 아닌 [[랑고바르드인]]이잖아!(Vos non Romani, sed Longobardi estis!)"라고 맞받아치고... 거기다가 서방과는 종교적으로도 자주 충돌했다. 이미 중세 초기부터 [[아카키오스 분열]], [[포티오스 분열]] 등의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로마 교회]]와 [[정교회|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충돌해 왔다. 초기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세적이었으나, 서기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방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균형을 이루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계속 대립하였는데, 나중에는 [[필리오퀘 논쟁]] 등으로 인해 교리적인 불일치도 커져 갔다. 이 대립은 서기 [[1054년]]의 맞파문 사건으로 절정을 찍었다. 교황이 파견한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로마 사절단을 '''맞파문'''하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십자군 전쟁]](특히 2차와 4차)을 거치면서 제국과 서유럽인들은 서로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제국인들은 오랜 세월 남부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이 지역을 노렸지만 결국 이곳을 점령할 수 없었다. 후에 [[노르만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로마-노르만 전쟁|제국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창건했다. 노르만인들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제국의 도시 두라초[* 오늘날 [[알바니아]]의 듀러스(Durrës).]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르만인들 또한 제국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용병]]으로 노르만인이 고용되기도 했다. 중세 서유럽인들은 정통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는 단지 '그리스인들의 황제(Imperator Graecorum)'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로 여겨졌으나 동로마를 싫어하여 모욕할때는 이렇게 불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번국]]으로 출발했지만,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니,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결정적으로 몰락시켜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 베네치아가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던 [[4차 십자군]]이다. 그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때 병사를 보내기는 했고 베네치아인들은 구원을 위해 결사대로 포위를 뚫고 나가기도 했다. 구원병이 없다고 알았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그 도시에서'라고 하면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볼 때 최소한 제국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로서는 제국이 유지되는게 무역이나 외교 등 여러 측면에서 이득이 컸고, 일부 베네치아인들은 예전부터 조계지에서 정착했던 도시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 등에게 '서둘러 힘을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도 국가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베네치아였고[* 실제 이 경고대로 [[2023년]] 현재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로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의 [[최대도시]]로 남아있다.], 동로마의 구원 사절단을 맨 처음 받아 교황과 여타 유럽 [[강대국]]들에게 빠르게 전달한 것도 베네치아였다. 물론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도시가 함락당하면 베네치아의 대외무역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지중해 거점들을 상실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한 이때 점령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의 [[최대도시]]로 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